소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얻을 수 있을까?
애쓴 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대로 두는 법을 안다면, 그대로 두어라. 허나 그 법이 쉽지 않다.
진실을 알고싶습니다. / 알면 감당할 수 있을것 같으냐?
그것이 누구를 위한 미래란 말이오? / 조선의 백성들과 조선의 후손들을 위한 미래이옵니다.
어찌 희생하지 않고서 그 신념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에 떤다면 어찌 모든것을 걸 수 있겠습니까?
나의 신념은 현실에 조롱 당하고, 나의 꿈은 안타까운 희생을 키워가는데...
포기하지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
마지막 소망, 내 나라 조선입니다.
-[한성별곡] Ending Narration
출처-매거진T
얼마 전 막을 내린 KBS의 8부작 사극 <한성별곡-正>은 주목할 만한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형식적, 내용적, 미학적으로 주목해야할 드라마임에 분명하다. 특히 모든 캐릭터들에게 알맞은 존재감과 무게감을 부여한 구성과 그들이 서 있는 곳에 따라 모두 다르게 해석되는 ‘正’이라는 신념(혹은 소망)은 독특한 긴장감을 형성했고, 신인과 중견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는 시청자들을, 그야말로 사로잡았다. 특히 극 중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지인을 숙청하고, 동시에 주변 상황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꺾이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상황에 처한 임금을 연기한 배우 안내상의 탁월한 연기는 <한성별곡-正>이 시청자들에게 선사한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80년대에 청년시절을 보내고 신학을 전공했으나 연기자의 삶을 걷고 있는 배우 안내상을 일산의 한 커피점에서 만났다.
무척 바쁘다고 들었다. 얼마 전까지 촬영에 몰입해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작품이었나.
그러게, 요즘엔 정말 바쁘다. (웃음) 엊그제 김해곤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숙명> 촬영분이 끝났다. 권상우와 송승헌이 출연하는 느와르 영화인데, 거기서 조직 보스로 나온다. 보스라고 해도 초반에만 보스고, 나중엔 아킬레스건이 잘리고 도망 다니다가 비극적으로 죽는 인물이다. 쉽게 말해, 파멸하는 역할이다.
<한성별곡>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됐다
<한성별곡>에서와는 전혀 다른 역인데. (웃음) <한성별곡>에서의 연기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떻게 참여했나.
곽정환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사극이라고 해서 안하려고 했다. 준비시간도 길고, 수염도 붙여야하고, 여름이면 아주 그냥 두꺼운 옷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라서(웃음). 그런데 <반올림>이 끝날 때쯤 선생님들하고 마지막으로 모이는 자리에 감독이 찾아왔다. 거기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는데, 사람도 괜찮고 작품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임금 역할이라고 해서, 한 번 걸어 볼 만하다, 욕심이 생겼지. 그 때는 내가 나온 다른 드라마를 보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촬영 때 내가 걸어 온 삶이 그를 움직였다고,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한 사람이 임금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캐스팅했다고 하더라. 예전에 멋모르고 했던 인터뷰를 봤던 거였다. 고마웠지. 많이 아팠던 시절을 배우의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풀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음란서생>에서도 기존의 왕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복잡하고, 불안하고, 예민하면서도 피곤한 인간이랄까. <한성별곡>의 임금도 양면적이고 복잡한데 어디에 중점을 뒀는지 궁금하다. 상식적으로 임금은 절대 권력인데 <한성별곡>의 임금은 객관적인 상황조차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름 정조에 대해서 연구도 많이 했지만 이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가설이 있어서 처음부터 설정을 갖고 들어가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완전히 비우고 시작했다. 대사를 충실히 따르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대본이 깊어지고 임금의 고뇌가 느껴졌다. 안타깝고 고통스럽고. 가슴에 그런 갈무리를 했다. 오히려 신하로 나오는 배우들이 모두 쟁쟁한 어르신들이란 게 힘들면 힘든 일이었다. 내가 대사 한 번 하면 그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만 제가 왕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마음이었지. (웃음) 평가받는 입장으로 매번 긴장했는데 다들 편하게 대해주셔서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극 중에서 임금이 자신의 소망에 대해 독백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가 과연 옳은 것이냐”라고 반문하는 순간의 감정은 어땠나.
6회에 나오는 그 대사는 촬영이 한참 지난 뒤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몇 개월이나 손을 볼 정도로 작가도 감독도 고민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딱 받았을 때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이 사람 정말 아팠겠구나, 정말 답답했구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강한 신념이 커다란 장벽에 부딪힐 때 참 외로웠구나. 정말 슬퍼서 처음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려고 다시 대본을 안 봤다. 대사도 안 외웠다. 촬영 일주일 전에야 건조하게 대사만 외웠는데, 혼자 운전하다가 문득 읊어봤더니 숨이 턱턱 막히고 눈물이 막 흐르고 가슴이 너무 미어져서 사고 날 뻔 했다. 이것만은 배우로서 책임을 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감정이 너무 깊어서 감독이 커트하더라. 신파가 되면 안된다고 해서 그나마 가지고 왔던 것도 다 버리고 감독과 다시 얘기한 후, 한 번에 찍었다.
그런 장면들 외에도 많은 장면들이 멋졌다. (웃음) 팬들이 ‘시크정조’라는 애칭을 붙인 걸 알고 있나. 인터넷으로 반응을 종종 살핀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렇게 부르는지는 몰랐다. 주변 사람들은 나한테 냉정한데. (웃음) 인터넷을 해도 공식 홈페이지에 들러 보는 정도다. 그래도 나쁜 평은 없어서 기분은 좋더라. (웃음) 스케줄이 많아서 요즘엔 인터넷도 못하고, <한성별곡>도 1, 2부와 6부 정도만 본방으로 봤다. 촬영 때문에 ‘본방사수’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웃음)
<한성별곡>을 현재 정권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대본을 봤을 때 임금과 노무현 대통령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는가.
현 정권을 연상시키는 대사들이 나온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냐”라는 대사도 있었고. 이거 너무 재미있었는데 반응이 직설적이라서 오히려 놀랐다. (웃음) 개인적으로 임금과 노무현 대통령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건 노무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과는 교집합이 전혀 없으니까. 그런 애틋함이 나를 좀 많이 움직였던 것 같다. 언론을 통해서만 접하던 최고권위자의 개인적인 면을 생각해 볼 기회였다. 솔직히 <한성별곡>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그 아픈 부분을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작은 소망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욕한다면 할 수 없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게 일종의 과제
처음에 신학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연기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신학대에 들어갔는데, 운동하는 선배들과 싸우다가 어느새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졸업하고 현장까지 갔다가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91년인가 92년, 서른 살 쯤에 덕수궁에 있는 공연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거기서 최형인 한양대 교수님을 만났는데 그 분 덕분에 연기가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건성으로 하면 죽어났으니까. 배우한테 “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어!” 이러면서 인간의 중심을 뒤흔들어 버리고 가식적인 부분들을 다 없애고, 그래서 모든 배우들이 엉엉 울고 절규하다가 자기 마음으로부터 다 토해내는걸 목격하니까 내가 살아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랑 놀고 싶어서 아카데미에 갔지만 바로 눈앞에서 그런 걸 목격하니까 헤까닥했다. 여기에 걸자. 그때 다른 분을 만났으면 아마 다른 길을 갔을지 모른다.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조직이구나, 했을지 모르고.
조직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다.
내가 한 조직생활이라는 건 학생운동 조직 밖에 없었지만(웃음), 사회조직에 대한 어떤 혐오감 같은 건 있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 회사에 취직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 걸 보면서, 저 세계에 발 담그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게 일종의 과제였다. 조직은 내게 해방구는 아니었다. 발도 들여 놓기 싫지. 지금까지도 조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니저나 소속사도 없이 혼자 일하는 건가.
그랬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스케줄이 많아져서 고민하다가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일주일 되었다. (웃음) 사흘을 꼬박 새고 직접 운전도 하니까 연기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대사도 못 외우고. 연기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혼자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니까 후배가 들어간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예전 미디어라고, 규모가 작고 사람들이 좋아서 갔다. 큰 회사라면 안 들어갔지. 이 세계의 다른 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기를 시작한 91과 92년 즈음은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지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이념적인 붕괴를 경험한 세대가 바로 91년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들인데, 갑자기 연기를 하려고 결심한 것도 그런 영향이었나.
그렇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지. 학생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사회주의였고, 시대의 문제는 군사독재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였으니까. 자본주의가 지배논리라고 인정하고 부정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고민했던 거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했던 거니까. 그야말로 경장이나 개혁이 아닌 혁명을 위해서 뛰어다녔는데, 세계는 점점 그런 것들이 무의미한 세계가 되어 갔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의 혼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하나, 길이 막혀버린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 사회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직에 대한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문제인데, 어디에 속해지기가 싫은 거였다. 사람이 방황을 하면 결국 자기 안으로 파고 들 수밖에 없는데, 파고들면 허하지. 그래서 매일같이 술만 마셨다. 마비 상태에 있으면 편하니까 또 마시고. 그러다가 이제 좀 살고 싶다, 웃고 싶다고 생각할 때 선배가 연극을 해보라고 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최형인 교수를 만나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렇게 연극을 시작했고, <백색인>이란 작품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단막 드라마로 TV에 나오게 되었는데.
<백색인>이란 작품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웃음) 그런데 영화를 처음 한 건 봉준호 감독이 찍은 단편이었다. 그가 홍대 앞에서 노란연구소라는 걸 운영할 때 좀 친하게 지냈다. 그때 김뢰하가 주인공인 단편에서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 역할로 한 씬 나왔다. (웃음) 연극은 한양 레파토리에서, 주로 코믹한 배역을 맡았다. 비극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진지한 역할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또 잘 웃겼다. 사람들도 좋아하고. 그러다가 공연을 보러 온 영화 조감독들을 통해서 영화도 찍고. 96년도에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가 첫 장편이었는데, 그 때 연극 <지하철 1호선>에서 행려 역할을 맡고 있었다. 조감독이 장선우 감독 작품이라고 해서, 내가 장선우 감독을 무지하게 좋아했다, 그래서 부리나케 뛰어갔다. 감독님이 서울역에서 살라고 해서 진짜로 살았다. 공연 끝나면 같이 무대에 섰던 애들하고 서울역으로 가서 행려들하고 어울리고, 술 먹고 놀고. 긴장되었지만 좋더라. 그런 삶도 내가 지향하는 삶이었으니까. (웃음) 묘하게 젖어드는 게 있었다.
함부로 연기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드라마는 언제 처음이었나?
2004년, KBS <드라마시티>에서 김규태 감독의 <아나그램>이라는 단막극으로 시작했다. 솔직히 드라마를 우습게보면서 터부시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건 또 다른 세계였다. 영화보다 더 빨리 진행되니까 순간 집중도가, 정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 번 밖에 안 찍어서 너무 놀랐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연기해야 한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내일 또 내일>에서의 장애인 연기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본이 너무 좋았다. 역할 자체가 무거웠고 가슴 아파서 참 많이 울었다. 전신마비인 주인공을 연기하면서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역할에서 못 빠져나오면서 진짜, 배우라는 직업은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임을 느낀 작품이었다.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처음 느낀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이 방영되고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10년 동안 울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보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나도 그 글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게 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슬프다 정도가 아니라 동일시되는 느낌이어서 그 날 밤 정말 많이 울었다. 그래서 함부로 연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지금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연기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내면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전달하려면 그 마음을 봐야한다는, 그만큼 치열해야한다는 뜻이다.
어떤 인터뷰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연기한다’는 얘기를 봤다. 연기라는 것,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무엇인가.
연기라는 게, 나한테는 무지하게 겁나는 거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거고, 한 번 찍어 두면 계속 가는 거라서(웃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요즘엔 카메라가 편해진 것 같다. 연기가 뭐냐는 질문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대신 매번 어떤 깨달음은 얻는다. 이 직업이 내가 뭘 어쩌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서, 계속 하면서 연기가 뭐고 내가 가야할 길은 어디고, 최종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 것인지 깨닫는다. 요즘엔 욕심도 생겼다. 많이 하자, 더 다양하게 해 보자, 쉬지 않고 해 보자. 나는 쉬고 싶지 않다. 아직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에 목말라 있다. 계속 해보고 싶고 더 들어가고 싶어서, 흥미진진하다.
연기나 삶을 통틀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
글쎄, 딱히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진실이 아닐까. 사실 나는 연기하면서 사람들도 잘 사귀고 장난도 많이 치면서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진지하지 못하고 진실되지 않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그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들을 우습게, 가볍게 봤을 수도 있다. 내면이 외양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그 진심으로 들어갈 때만이 내가 살아남고 내가 존재한다고 느낄 것 같다.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원하는가?
글쎄... (잠시 생각하다가) 그런 건 그냥 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 기다려 보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다. 생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스트레스가 있다는 얘기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질 때가 있다. 딱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봤다. 길에 있는 돌도 진짜 아름답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좋아 보이고, 누구를 만나도 다정한 느낌이고. 그런 삶이면 좋지 않을까. 지금도 그런 것들을 향해서 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면이 행복할 때에야 모든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출연작
영화-백색인, 나쁜 영화, 우산, 공포 택시, 불후의 명작, 다이아나, 정글 쥬스, 공공의 적, 2424, 욕망, 오아시스, 황산벌,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알포인트, 시실리 2km, 말죽거리 잔혹사, 강력3반, 말아톤, 플라이 대디, 아홉살 인생, 잘 살아보세, 극락도 살인사건, 두 사람이다, 물 좀 주소, 이브의 유혹
드라마-별순검, 혼자가 아니야, 반올림2, 반올림3, 열여덟 스물아홉, 부활, 소문난 칠공주, 심청의 귀환, 크라임, 한성별곡, 소문난 칠공주
사실 다른 데에서는 잘 모르겠고, '한성별곡'에서 눈에 확 들어왔다.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카리스마의 정조를 잘 연기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