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3:12~23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리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새삼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더할 나위 없는 감사함을 느낀다. 만일 아직까지도 중세시대처럼 성경을 성직자만 볼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글줄로 표현하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때로 성경말씀을 보다 보면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고 마음이 느껴지고, 하늘에만 계신 신이 아니라는 것, 지금 이 순간에 함께 하심을 느낀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의 신적 존재가 우스워진다.
세상에서는 때때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인간의 불완전한 인격에 빗대어 말하지만,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말인가. 인간성의 시원은 하나님이 아닌가. 인간성의 시원은 신성, 따라서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신성은 사람과 동떨어진 그저 추상적인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 사랑, 분노 등의 모든 감정을 포함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 감정들을 느낀다.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다. 단지 신성에는 인간의 죄성이 빠졌을 뿐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다워보이는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에 죄가 끼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죄가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고 상처입히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죽이려 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말로, 폭력으로 죽이는지,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 실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어린 자식이기 때문이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죽을 꽃조차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편애에 가까워 보인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우상숭배한 자를 진멸하시는 하나님은,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가 죽을까봐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시고 등만 보이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은혜를 구하는 자, 영광을 요청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관계하시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돌보셨던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방인이 하나님을 불러도 외면하지 않으셨다. 생각해볼수록 놀라운 일이다.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를 보니, 내가 회심했을 초기에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 간절함,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찾았던 나를 오늘도 부르시는 하나님. 그 어떤 대단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계를 원하시는, 소통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느낀다. 그 사랑을 사람에게 주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한갓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나는 여전히 오늘도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느낀다. 그 신실함, 사랑을 느끼며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