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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by 피스메이커 2012. 10. 16.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박노해씨가 펴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를 누군가가 부른다.

사람만이 희망이고,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가? 어떤 의미에선 그럴지 모른다.

지금 세상에서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종교는 중세시대에나 진리였다. 지금 종교는 빛바랜 책갈피처럼, 그저 임시변통의 교양과목같은 인상만을 주고 있다. 매일 지구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굶어죽고, 우울증이 암처럼 번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여자들이 강간, 살해당한다.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열심히 산다고 살아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은 내 발밑을 강타한다. 물질숭배의 시대에 물질이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문명은 빛의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데도, 무언가 정작 중요한 것이 빠진 느낌. 내 가족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평생 노력했는데도, 믿고 있는 사상 혹은 꿈을 향해 똑바로 최선을 다해 걸었는데도, 밤에 이불을 덮고 누우면 우울증이 캄캄한 입을 벌리고 덮치는 지독한 느낌을 가져본 사람들 중에 당신은 포함되지 않는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 삶의 갈증.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철학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해답을 사람에게서 찾았다. 그런데, 자식을 살인범에게 잃은 부모가 그 살인범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국회에서 정당의 이익, 좁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난투극을 벌이고 욕설을 퍼붓는 국회의원들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욕정을 채우기 위해 어린 소녀의 몸을 사는 사람을 보며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직원들은 몇달 째 월급을 받지 못했는데, 골프여행을 다니는 사장을 보며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다수 '사람이 희망'이라고 하는 경우는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는 소시민,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금은 이기적이고 조금은 이타적인 많은 사람들을 가리킬는지 모른다. 또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상처받은 것을 다른 사람이 치유해 주었나? 그것은 얼마나 지속효과가 있었나?

변하는 것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으며 일부에게 해당되는 것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저 잘 포장된 말로 희망을 말하는 것은 허망할 뿐이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뜨는 해를 보고 우리는 빛이라고 부른다. 빛의 성질은 바뀌지 않는다. 어둠을 몰아내고, 따뜻한 기운으로 생명을 살리는 빛.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면서도 성공을 향해 걷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른다.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걷느냐가 먼저다. 어떤 집을 지을지 계획을 짜지 않고 공사부터 하는 건축가는 없고, 도착역이 어딘지 모르면서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없다.

앞에서 빛을 말했다. 나는 희망을 빛이라고 생각한다. 그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사람만이 희망'인가?

사람이 빛인가? 그럼 사람은 왜 태어났고 어디로 향해 걷고 있는지 그 답을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었다면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