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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 춘추전국시대

by 피스메이커 2010. 4. 6.

중국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 힘없던 노나라의 왕(요로)은 평민출신임에도 남다른 지식으로 백성들에게 추대 받는 공자(주윤발)를 등용해 왕권을 강화한다. 공자는 호시탐탐 노나라를 침략하려는 제나라의 야욕을 다양한 지략과 병법으로 물리친다. 또한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내란을 해결하며 최고의 벼슬인 대리국상의 자리까지 오르는 공자. 하지만 나라의 실직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신하들은 그를 못마땅해하며 계속해서 견제한다. 결국 그들의 계략에 넘어간 왕은 공자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동양의 철학자 중 가장 잘 알려진 공자. “공자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그가 명언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이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 변신을 한다. <공자: 춘추전국시대>는 공자를 철학자가 아닌 위기의 시대에서 나라를 구하는 지략가의 모습에 무게를 둔다. 실제 높은 학식과 함께 활도 능히 다뤘다는 공자는, 책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놀라운 지략과 전술을 보여준다. 제나라와 노나라가 협곡에서 회담을 가진 협곡지회(峽谷之會)장면은 공자의 뛰어난 언변과 위기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서희 장군의 담판과 비견될 정도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온 일화와 100대의 우마차로 500대의 전차를 물리쳤던 용병술은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공자의 또 다른 면을 부각시킨다.

이처럼 공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영화는 백성을 위해 힘쓰는 그의 모습도 보여준다. 세 가문이 실권을 장악함으로 왕권이 약해진 노나라. 각자의 땅에 성을 쌓고 군사를 배치해 세력을 키우는 세 가문은 점점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한다. 왕권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백성을 살리려는 공자는 왕에게 그들의 성벽을 허물자는 타삼도(墮三都)를 건의한다. 이로 인해 세 가문의 견제가 심해지고 내란까지 이어지지만, 공자는 화공(火攻)으로 막아내며 위기를 넘긴다. 또한 죄 없는 사람들까지 땅속에 묻는 순장(殉葬)의 악습을 멈추기 위해 뛰어난 언변으로 왕과 신하를 설득하는 모습 등은 인(仁)을 통해 백성을 다스리려는 공자의 정치적 사상까지 드러낸다.

<공자: 춘추전국시대>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공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공자의 매력은 떨어진다. 세 가문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계손사’의 계략으로 왕에게 버림받은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고 다른 나라로 10년 동안 방랑 생활을 한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떠돌며 험난한 여정을 떠나지만, 굽이쳐 흐르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초반보다는 긴장감이 떨어진다. 또한 왕에게 버림받고 길을 떠나는 공자의 뒷모습, 강물에 빠진 그의 책을 건지다 목숨을 잃는 제자 등 감정에 호소하는 작위적인 장면들은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극중 공자 역을 맡은 주윤발에게서 <영웅본색>의 강한 카리스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번 갈등하고 실패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연기만 놓고 봤을 때,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정도로 인간미가 넘치는 공자를 잘 표현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배우들의 영향력이 적다. 특히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공자를 공격하는 계손사 역의 진건빈, 위나라 왕의 첩으로 그를 유혹하는 남자 역의 주신은 나름대로 캐릭터에 맞는 연기를 펼쳤지만, 그 분량이 짧아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그의 연기도 점점 힘이 떨어진다.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원체 사극을 좋아하는지라, 서방과 같이 봤는데, 중간에 잤다. 초반에는 좀 지루했기 때문. 나중에 나머지를 다 봤다. 기사에서는 제자의 죽음이 작위적이라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전체적으로 좀 건조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부분이 좋았다. 제자들에 대한 공자의 사랑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뭐 어떻단 말야.
그러나, 방랑 후 노나라에 다시 돌아왔을 때 공자가 느꼈을 감동이 별로 공감되지 않았다. 방랑 중간 중간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달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기사대로, 공자의 인간적인 부분들이 와 닿았고, 인의예를 중시했던 공자의 가르침은 물질만능,실리제일주의로 황폐해진 현대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수되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하지만, 유교는 확실히 종교는 아니다. 철학이자, 삶의 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래는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공자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 교육철학).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 정치철학).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