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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취미/Travel

길치, 인생치, 강릉으로 가다 - 둘째날

by 피스메이커 2019. 10. 17.

게하에서 셀프 토스트로 아침을 때우고 고민을 했다. 원래 계획했던 곳은 동해쪽과 대관령 양떼목장이었는데, 다시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가 부담스러워 쉬이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대관령은 비가 와서 방목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여러 행선지 중 제일 가까운 안목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안목해변에 도착했다.
또 비가 내린다. 비가 안 온다고 해서 우산을 안 샀고, 그렇게 나는 또 비를 맞으며 해변에 서 있었다. 어제처럼 우렁차게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비 올 때의 바다는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비올 때 바다를 가는 일이 많지 않으니까.

갈매기들이 날기에는 험한 날씨라는 걸까. 모래사장에서 쉬고 있다.

파도가 날씨 좋을 때처럼 잔잔한 것이 아니라 으릉으릉대며 위협하듯 치올라오는 모습은, 인간이 압도적인 자연을 대할 때의 감동을 주었다. 저 바다의 색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어두운 회색에 녹색을 조금 섞었다고 할까. 포말이 군데 군데 솟은 바위에 부딪치며 하얗게 사방으로 부서진다. 하지만 바닷빛과 섞이지 않는다. 저 색을 물감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 낮게 깔린 구름은 흰 빛, 횟빛, 검은 빛을 서로 가로질러간다. 내가 화가라면 이 장엄한 장면을 그려낼 수 있을까. 사진으로도 담기지 않는 이 묘한 감동을. 비오는 날 바다에 가보라.
하지만 거기 물가는 비싸다.
(그나마 공차는 밀크티 4000원, 점심은 중앙시장으로 넘어와서 먹어야겠다.)

 

강릉이 드디어 말간 얼굴을 보여주었다. 구름이 물러가고 파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볕이 나온 것이다. 이대로 비내리는 강릉을 뒤로 하고 돌아가야 하나 슬퍼하던 내게 천국 같은 소식이다. 이제 마음껏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맑은 호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릉에서 유명한 음식을 한 끼는 먹고 갈 생각에 '옹심이'를 찾고 있었는데 동선에 걸리지 않아 고민하던 중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이 자신의 호를 딴 '초당두부'를 개발했다는 정보에 솔깃했다. 수공업자를 천시하던 당시에 명망있는 사대부가 두부를 개발해 욕을 먹었으니, 욕 먹을 것임을 알고도 개의치 않은 그 선비가 만든 두부를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버스와 지도앱을 이용해 그 지역 '초당동'을 찾았다. 재미있는 건 내가 어제 허씨남매 생가를 찾겠다고 부들부들 떨며 빗길을 걸었던 그곳이었다. 너무 고생해서 디시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곳인데, 이 날씨에 멀리 가기 애매했기에 고민고민하다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보지 못한 허씨남매를 다시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미리 검색해본 '뚱할머니 순두부'를 찾아서 한참을 걸었으나 정기휴일! 전화를 미리 했어야지, 나는 무작정 바보다. 다시 검색후 평점은 좀 떨어지지만 다른 곳을 찾아 또 걸었다. 인생은 이렇게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뜻대로 되는 인생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식당으로 걷는 길에 만난 '쭉쭉나무'들. 강원도에서 자라는 종일까? 뭔가 주위에서 흔히 본 애들이 아니라 위풍당당하게 키가 크다. 사극에서 본 애들 같다.
글 읽기가 길지? 한 마디로 선사시대 유적들이 나온다는 거다.
앱이 가라는대로 갔더니, 대로가 아닌 이런 골목길을 걸었는데 뜻밖에 예쁘고 소담한 길을 만났다.

 

메뉴 이름은 그저 초당순두부. 건강한 요리를 잘하지 못하고, 한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맛있게 먹었다. 매콤한 걸 먹을까 했는데 1인 메뉴가 없어 시킨 건데 예상 외로 맛있었다. 조미료 맛 없이 담백하고 건강한 맛이었다. 참고로 나는 맛에 예민한 편이 아니다. 비지랑 된장 모두 맛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1인 메뉴가 하나 밖에 없다는 거다.

감이 떨어질 것처럼 우수수 매달려있다. 옛날 우리집 꼬맹이가 진짜 꼬맹했을 때 살았던 동네에서 많이 본 풍경이다.
어제 내가 비를 피했던 카페가 오늘은 문을 열었다.

어제 보지 못한 허균허난설헌 기념관부터 가보았다. 비온다고 문 닫았다가 비 그쳐서 문 열었나 생각했는데, 그냥 월요일은 정기휴무일이었다.

호정-경포호 정자

호정-경포호 정자       연기안개 푸르른 호수 빛 넘실거려 / 가을꽃 밟으며 죽방으로 들어가네 / 머리 희고 팔년 만에 다시 와 보니 / 그림배에 홍장 싣고 갈 뜻이 없어라 - 허균 지음

허균이 조선시대 정도전부터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시 888수를 가려 뽑은 시선집( 詩 選 集 )
홍길동전 목판본

허균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홍길동이라는 판타지의 영웅을 만들어낸, 소설을 곱게 보지 않고 적서의 차별이 있었던 시대의, 깨어있는 문인이자 특별한 작가이다. 롤모델로 삼을 만한.

난설헌집 목판본

기대했던 것보다 자료가 많지 않았다. 

다시 생가에 가보니, 해설해주는 안내원이 있었다. 몇몇 부분 빼고는 거의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했던 내용이라 대충 듣고 비 때문에, 가보지 못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항아리 옆에 세워진 현대적 구조물은 왜 세워놓은 걸까. 난 이런 거 거슬린다. 그냥 그 시대 속에만 머물러 있고 싶은데.
알려져 있을 뿐 확인되지 않은 고택이었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역사란 게 그런 부분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비슷한 모습의 집과 비슷한 위치에 살았겠지.

생가에서 나와 경포호로 향했다. 버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아 서둘러야 했다. 꽤 많이 걸어서 슬슬 발목이 아파오는데, 가는 길까지 헤맸다.

경포호로 가는 길
난설헌 허초희에 대한 내용과 그녀가 지은 시, <죽지사>와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앙간비금도>에 대한 내용이다.

경포호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호수면이 마치 거울과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과연 그런 듯 보였다. 이때 바람이 수면을 약간 흔들고 있었는데, 고운 하늘과 주변 풍광이 고스란히 비친다.

가시연이 피는 습지가 호수 옆에 있었다. 가시연은 연잎과 꽃봉오리에 가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허난설헌이 떠올랐다. 조선시대에서 그녀는 가시연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고운 자태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개화시기가 아니어서인지 흔적만 보인다.

경포호를 끝으로 터미널로 향했다. 

1박2일만 돌기에는 아쉬운 여정이었다. 비가 와서 제대로 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여행지에서 한 달, 혹은 몇 달씩 머물렀다 가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여건만 허락된다면 그러고 싶었다. 며칠로는 그 지역을 온전히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다.

다음에는 동해와 대관령을 가보고 싶다. 체력을 열심히 준비하고, 사전에 그 지역에 대한 역사적 정보도 확인해서 가야겠다. 그리고, 강릉이 또 떠오른다면 다시 올 것이다. 고택에서의 비오던, 시간이 거꾸로 간 하루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